[담양신문] 소설이 연출을 만나 악극을 낳았단다. ‘윗도리’(이화경, 동화)에서 이들이 이룬 조화를 본 적이 있는데, 이번엔 극단 ‘깍지’까지 합세한 무대극이다. 어떤 작품이 되어 나올까? 원작 ‘노라의 뽄(本)’(이화경, 『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합니다』 2023)을 다시 읽는다. ‘노라’의 근원(本)인 가부장적 습성은 여전히 대물림되고 있다. ‘허생의 처(이남희)’가 떠오를 수 밖에. “나는 내 남편이 하는 일을 모르고, 남편은 제 아내인 나를 모르고…” 전혀 딴 세상을 사는 두 존재, 이쪽을 보아주지 않는 저쪽의 곁을 지키는 아내의 속울음이자 약자의 외침이었다.

책으로 돌아와 악극을 상상한다. ‘무대 배경-목포 항구, 주인공-백 년 가까이 봉인된 새아씨의 목소리’라고 적는다.

바닷가에서 자란 나는 파도와 함께 일렁이고 출렁였다. 엄숙한 집을 탈출해 ‘배미테’라 부르던 백사장으로 자주 달려갔다. 담양에 살면서도 대숲 전체가 큰바람에 눕고 일어설 때면 고흥의 바다를 느낀다. 파도 소리를 닮은 바람 소리에 맞춰 몸을 ‘이쪽, 저쪽’으로 흔들면서.

‘누구든 사랑과 자유를 동시에 갈망한다.’라고 써 둔다. 남편처럼 아내도, 당신처럼 나도! 그러고 보니, 목포의 새아씨도 모던보이-남편도 어쩐지 또 다른 ‘나’ 같기만 하다. 다시 ‘누구나 이쪽과 저쪽이 있다. 벗어 던지고 싶은 갑옷을 입은 채, 자유를 갈망한다.’라고 고쳐 쓴다. 내 안의 두 역동-남성성과 여성성은 늘 함께 존재한다.

그런데, 악극은 어느 편일까?
상상했던 이미지를 안고, 악극 ‘노라의 뽄(本)’(박강의 연출, 극단 깍지, 2025)을 관람했다. 이럴 수가! 예상을 뒤엎은 연출이었다. 깔끔하고 담백했다. 현대사의 격랑 속 서민들의 한을 마당극 형태로 담아왔던 연출가였기에 상여소리와 함께 파도를 가르듯 천을 찢고 나가는 씻김굿이 나올 법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사뭇 달랐다. 최소한의 소품만 두고서 빈 공간은 관객의 상상에 맡겼다. 없으나 있고 보이지 않으나 보이는 것들, 산수화 같은 무대에서 어떤 경지에 다다른 연출가의 대범함을 엿보았다. 각자가 생각하는 바다, 각자가 상상하는 피아노가 거기 있었을 것이므로.

‘이쪽, 저쪽’ 사연을 풀어내는 배우들의 연기는 ‘서정적’이었다. 극을 서정으로 느꼈다는 것은 아무래도 음악 덕분이겠다. 원작에서처럼 주로 아내의 비감을 담은 노래들이 많았다. “비감이 흉리에 충일하다.”라고 쓴 이는 역설적이게도 남편이었으나 그를 대변해 주는 노래는 많지 않았다. 극 후반부에 다다라서야 “벗어나 보려 쓰고 또 쓰지만”이라는 가사가 반복되며 그를 동정하게 했다. 남편, 나, 안쪽이가 부르는 삼중창은 매우 입체적이었다. 남편의 상처, 두려움, 방랑이 아내의 슬픔과 겹을 이뤘고, 그 가운데에서 안쪽이는 돌아가신 어머니인 듯 그를 돌보고 싶어 하는 몸짓이었다.

조명은 그들 모두를 감쌌다. 여백이 충만한 무대는 인물의 정서를 대변하는 커다란 캔버스였다. 빛은 공간과 시간을 그리며 무대를 푸르고 검은 바다가 되게 했고, 화사한 봄 동산도 마술처럼 그려냈다. 더러 과한 것 아닌가, 좀 더 자연스럽게 파스텔톤으로 스몄으면 하는 장면도 있었지만, 취향의 차이일 것이다. 빛은 무대의 오른쪽과 왼쪽을 나란히 조명했다. 마치 가부장적 사회가 만든 비극은 왼쪽-아내뿐 아니라, 느닷없는 결혼과 마음에 없던 삶을 강요받은 오른쪽-남편에게도 있었음을 들춘 것이다. 빛은 어두운 곳을 비춰내게 마련이다. 그것은 명암과 농담으로 묘사하는 조명의 힘이기도 했다.

조명을 따라 나는 무대 왼쪽과 오른쪽에서 나의 이쪽과 저쪽을 느낀다.

나-왼쪽, 사회적 가치에 순종하며 자신을 금지하느라 자유를 누리지 못했다.
나-왼쪽, 너의 발바닥 아래에서 네 꿈을 지탱하는 생활이 되었다.

나-오른쪽, 생활은 삶이 아닌 것 같아. 마음이 시키는 대로 자유롭게 살고 싶다.
나-오른쪽, 결국 새가 되지 못하고 검은 물결 속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자칫 무겁고 서글픈 이야기로 끝날 극이었다. 그럼 그렇지! 사이사이 맛깔스럽게 등장하는 광대가 긴장을 풀어준다. 변방의 관객들은 점잔을 빼지 않았다. 배우가 이끄는 대로 기꺼이 코러스로 극에 동참한다. 손뼉을 치고 장단을 맞추며 함께 노래한다. 이 고장의 관객은 눈치가 빠르다. 박자도 잘 맞춘다. 엇박자가 없다. 순간, 무대 이쪽과 저쪽은 하나가 된다.

이제 아껴둔 ‘안쪽이’를 만날 차례다. 연출가는 원작 새아씨의 심연을 ‘안쪽이’라는 인물로 캐냈다. 그리고는 전면에 등장시켰다. 여인은 그동안 자신의 내면을 만나고 있었던 것이다. 언제나 자기 안에 있는 것, 자신의 안쪽을 의지하며 ‘그저 인생’이고, ‘그냥 삶’이라도 여인은 살아내었다. 그랬다. 몸종은 자신의 영혼이기도 하여 “나”를 돌본다. 그것을 실연(實演)한 여인은 발 뻗을 곳 없이도 서러워 보이지 않았다.

공허해 보이는 쪽은 오히려 남편이었다. 그는 자신과 화해하지 못하고 끝내 죽음을 택했다. 연인과 ‘각자’ 해방을 꿈꾸며 검은 바다에 몸을 던졌다. 하지만, 그들은 해방되었을까? 어머니를 ‘강 건너 상여’로만 그리워했고, 아버지를 거역할 수 없었던 어리디어린 떠돌이 양. 어머니를 애도하지 못한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을까? 그는 끝없이 유랑했다. 열아홉 살 문학청년에게 느닷없는 떨어진 혼인령, 그것에 복종한 자신이 미웠을까? 마음에 없던 강요된 결혼, 사랑은 없었다.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던 시기, 장남이었기에 닥친 느닷없는 속박, 어쩌면 그는 위로가 필요했다. 월계꽃과 나나와 루루를 사랑하는 동안 그는 행복했을까? 아니지, 늘 저쪽으로 떠나버린 여인들만 가슴에 묻어 추억할 뿐이다. 관념으로만 사랑하는 것, 그는 사랑을 알지 못했다. 충분히 애도하지 못한 이의 깊은 상처는 끝없이 스스로를 괴롭혔고, 마약처럼 그것을 잊기 위해 방랑했다. 그는 시인이고자 했고, 희곡을 쓰는 문필가였다.

여인은 달랐다. 원작에 없는 안쪽이가 있었다. 내 안에서 나를 가장 잘 이해하고 다독이는 존재, 억누른 내면의 소리를 질러주고 관습에 묶인 나를 대신해 나대주는 존재, “나의 안쪽이”

막이 내릴 무렵 “나”와 ‘안쪽이’는 100년 전 여인에서, 2025년인 지금으로 걸어 나온다. ‘나’와 안쪽이가 무대 앞쪽으로 걸어 나오면 그림자는 6개 4개 3개 2개로 좁혀진다. 원작에서는 알려주지 않았던, 내 이름은 ‘나’라는 존재 자체를 명명한 순간 ‘그림자’는 사라졌다. 무대는 밝았고 나와 안쪽이는 경쾌했다. 남편의 그림자를 좇으며 살아온 삶이었다.

내 이름은 …… “나”라고 했다. 그러니까 나의 이름은 오직 ‘나’여야만 했다. 노라, 나나, 장미화가 아니라, 순희, 영아, 정숙이도 아닌 ‘나’!

작품은 말한다. 사랑은 갈구하는 게 아니다. 자기의 안쪽을 사랑하며 홀로 설 때, 사랑은 시작된다. 없는 것에 전전긍긍할 일이 아니다. 사랑할 것은 많기도 하다. 그렇기에 “기다리고 기다리며, 사랑하고, 사랑하리”라는 노래로 생활을, 삶을 이어갈 수 있다. 여인이 기다리고 사랑한 것, 그것은 이미 저쪽으로 떠난 남편이 아니었다.

작품은 묻는다. 나를 보아주지 않는 ‘타자’에 기대지 않고, 자신인 ‘나’로 잘살고 있느냐고. 당신은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고 있느냐고! ― 이 질문은 휘청이거나 고단할 때마다 툭툭 튀어나와 나를 건드릴 것이다.

이 한마디를 듣기 위한 악극이었다. 여인은 그 시간을 건너왔고, 발견했다. 너의 존재와 사랑이 나를 가치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네 사랑의 유무와 상관없이 나는 너를 사랑했다는 것을. (자기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사내를 끝까지 사랑하기로 한 것은 여인의 선택이니, 존중하기로 하자.)

나 또한 운명을 걸고 사랑한 것이 있다. 그것은 나를 버티게 하는 희망으로 존재한다. 노랫말처럼 ‘끝내는 닿을’ 이쪽과 저쪽, 내 안의 여성성과 남성성이 조화를 이루는 삶. 나와 너, 이웃과 자연을 살리는 삶. 윤동주처럼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며, 나를 넘어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삶.

그 길 위에서 나는 오늘의 무대를 오래 기억할 것이다. 악극을 관람한 날은 가을의 시작이었고, 가을이었고, 가을이었다.